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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해석] 미드소마 - 현가령될 만하다 좋네요
    카테고리 없음 2020. 2. 19.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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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소마의 단점을 먼저 지적하면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믹크의 인류학과 학생들이 스웨덴 홀이 촌락이라는 1개, 평온하게 보이는 종교 공동체 방문을 한다. 이 영화가 공포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어떤 1이 일어날지는 드러난다. 정말 끝까지 1프지앙고도 예상에서 친구어 나쁘지 않아는 부분이 없다. 더욱이[한 31금요일 1]처럼 살육 장면을 직접 보이는 것도 한번밖에 없고 결과만 보인다. 그런데 달리기 타이 외의 2시간 27분이 나쁘지 않다.​ 무슨 재미로 이 영화를 보면 1프지앙? 영화 속 촌락의 귀중한 연습을 감상하는 재미다. 이것이 공들여 길게 묘사되지만, 여기서 재미없으면 지루한 감정이 될 수도 있다. 1부 평론가들 사이에서 20분은 클리어 해야 한다는 안의 용도 아니고 왔다고도 살고 있는데, 이 영화를 끝까지 그와은심로프게을 보려면 주인공들처럼 인류학적 관심이 어 떤 정도 필요하다. 이 촌락의 해괴한 연습은 감독이 대충 나쁘지 않게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드소마는 유사 장르의 영화와 달리 종교공동체를 쉽게 악마화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홀이 촌락이 갖는 치유의 측면을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홀거 촌락의 교리와 제의는 비정상적이고 악마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종교적 정합성을 갖췄다. 그리고 큰 불행을 겪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대니가 촌락으로 내려와 치유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꽤 본인 설득력 있다.이 촌락에서 일어나는 야만적인 제안이 어떻게 대니에게 MASound의 평온을 줄 수 있었을까.유사한 살인을 제안한다는 문명이 역사적으로 있었다. 이 영화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뷔페의 인신공양도 있고 남미 아즈텍의 인신공양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인신공양을 야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학자가 있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꼭두각시라는 책에서 현대문명이 아즈텍의 인신공양보다 오히려 야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이렇다. ​


    근대 다음으로 사람들은 혼돈의 세계에서 고통과 죽음을 없애고 질서와 평화를 수립하는 것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이렇게 질서와 평화를 어느 정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우울, 불안, 고독에 찬 삶을 살게 됐다. 기만적인 목표에 스스로 속은 것이다.그러나 인신 공양인 아즈텍인에게는 그런 기만적인 환상은 없었다. 아즈텍인의 목표는 고통과 죽음의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불완전한 세계를 내면에 품기 위한 수단으로 살육을 한 것이다. ​


    현대인들은 고합격 죽소리에 자신 있다는 것, 확실하게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을 막고 미루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이러한 개인의 취향은 근대 이후에 더욱 심해졌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고합격 죽소리를 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불행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됐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가 되었다. 사고는 아무리 도망쳐도 운명의 신에게 쫓기는 것이고, 그때 사람은 심각한 패닉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부인해 온 만큼 더욱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 대니와 크리스천이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이 전형적인 현대인의 패턴, '부정'과 '무시'였다. 동상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대니와 크리스천은 별것 아니라며 흥미를 끌기 위해서라고 부정한다. 대니가 가족사고로 달리는 것을 보고 크리스천 친구는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대니는 가족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울음소리가 나고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절대 꺼내서는 안 된다. "불행은 1단 덮고 피하고 본다"이 현대인의 좌우명이었다 하지만, "미드 소마"의 홀가 공동체는 불행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가 되면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나무 소리로서 자연의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 없을지도 모르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대나무 소리와 재생이 무한 반복 순환하는 것이었다.하지 유럽 각지에서 열리는 메이폴 축제는 이런 대나무 소리(겨울)와 부활(여름)을 기리는 행사였다. 거꾸로 걷는 것은 시간이 순환하고 반복되는 것을 상징하는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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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의 소음과 고통은 인생만큼 아름답지 않고 당연한 순환과정이므로 숨기고 부정하고 외면할 필요는 없다. 홀거마을은 이런 대나무 소음과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구조화돼 있다. 인신 공양 제의는, 이러한 순환론의 세계관을 확인하고, 내면화하는 절차였다 그렇게 되면 대나무 소음과 고통을 더는 두려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이 보신(保信)을 받아들이게 된다.죽음의 소음을 피하려는 것은 사람, 아니 모든 생명체의 본성이 아닌가? 어떻게 그 본성을 거역할 수 있지? 물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사고는 아니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의 신비한 힘을 빌면 이 본성의 역행을 이뤄낼 수 있다. 그래도 회의적인 사람은 넘기지 않겠지만 대니처럼 끔찍한 불행을 겪은 사람은 다르다.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이런 신기한 힘에 의지하기가 쉬워진다. 지금처럼 고허가 불행을 피할 수단이 없는 원시인과 고대인도 이처럼 대나무 소음과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종교관을 가진 경우가 실제로 많았다.홀이 공동체에서 성장한 펠레는 대니와 단둘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수어 가족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그는 그녀에게 그 노인이 자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니가 일부러 배신 부정하려고 했던 것을, 그것이 자연의 순환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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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신론적 교리를 믿는 이곳에서는 자연도 숨쉬고 인간과 일체가 된다. 대니는 손과 발에서 풀이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가 하면 메이폴 여왕이 되면 온통 꽃으로 장식된 옷을 입는다. 남자친구의 크리스천도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게 되고, 살해된 시체는 마당에 나무처럼 심기거나 꽃처럼 꾸며진다. 영화에는 이처럼 인간 고유의 개체성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듯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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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하본인의 원천에서 본인 온 것이고 본인 없는 본인의 나뭇잎처럼 자연의 부분일 뿐이므로 개체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절벽에 떨어져 자살한 노인들의 체면을 구기는 의식은 케케묵은 개체성을 지우자는 뜻으로 보인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한 사람의 기쁨과 고통을 전체가 함께 느낀다. 다리가 부러진 노인이 아파 외치면 다른 신도들도 함께 울부짖는다. 크리스천과 마야의 성교 의식에서도 다른 여자들도 일제히 고함을 지르거나 대니가 슬픔에 통곡하자 다른 여자들도 함께 통곡합니다. 이곳에서는 내가 기뻐하면 온 세상이 기뻐하고, 내가 아파하면 온 세상이 아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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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줄기에 매달렸다 폈다 지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나뭇잎과 꽃은 이러한 범신론적 순환론적 세계관에서 즐겨 쓰이는 상징입니다. 자신의 나뭇잎이라는 개체는 낙엽이 되어 사라지지만 같은 줄기에 새로 자신의 나뭇잎이 자란다. 개체는 죽지만, 자신의 의무는 영원하다. 태양도 이러한 세계관에서 많이 사용되는 상징이지만, 모든 생명력이 이 자신의 원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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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론 이 궁극의 근원이 일시적으로 분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개체로서의 자아의식은 환상일 뿐이고, 세상 만물은 본질적으로 하본이다. 이것은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핵심 교리인 범 범일여(一大)와도 거의 대동소이하지만, 거기서는 브라흐만을 본인무본인 태양과 같이 근원적인 존재로 상정한다. 영화에서도 근원 the source라는 내용이 여러 차례 본인인데 촌락 장자를 둔 아이는 이 근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고 한다. 인간적인 인식능력, 즉 개체성에 의한 자기 인식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이를 낳기 위해 이 마을 사람들은 미리 계획적으로 근친상간을 한다.이런 세계관 아래서는 살인도 죄가 아닐지 모른다. 죽는 sound는 사람은 자연의 역시 다른 형태로 되돌리는 것이고, 본질은 결국 하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살인을 굳이 할 필요도 없는데 개별자의 이기심이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지 다만 이런 세계관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인신공양을 제안할 때만은 예외였다. 이때 희생물을 죽일 필요가 생기지만 영화의 제안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심이 되는 제물에 곰의 가죽을 씌우는 것은 인간과 같은 동물에 내재된 공격성 야수성을 정화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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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제안을 통해 자신이 범신론적 순환론적 세계관 중 하나이며, 모두가 근원과 연결되어 있어 죽는 sound는 당연한 순환 과정일 뿐이고, 고통은 모두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sound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었다. 이렇게 쓴다면, 마치 내가 이 홀이 공동체의 전도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대니는 제의로 치유되었다. 감독이 분명히 제시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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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고허가 대나무 소리 문제에 대해 이 홀이 공동체와 아주 비슷한 해법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다. 물론 그가 인신공양을 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홀이 공동체의 그것과 놀랄 만큼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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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점에서 앨리 애기스터의 전작 유전도 비슷한 염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별자는 무엇인가 더 큰 것을 "전승"해 연결하는 매체 하나만으로, 그 역할을 완수하면 소멸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므로 운명에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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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불교적인 느낌도 든다. 쇼펜하우어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 수피즘 등 동양 종교를 탐독했고 거기서 서구 문명의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비결을 찾았다. 동양뿐 아니라 고대 서구에도 이처럼 이와 유사한 범신론적 순환론적 종교가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력을 얻고, 거의 이단 취급을 받아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홀거 공동체는 이처럼 자취를 감췄던 서구권의 고대 종교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종교적 정합성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대니가 그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그토록 불쾌한 역설 때문에 이 마을의 살인 제의는 더욱 기괴하게 느껴진다. 외부인인 대니와 그 칭구들의 이름에서는 기독교에서 맛있는 맛이 난다. 대니는 구약성경 다니엘이지만 모략을 받고 사자밥에게 던져져 살아난 유대인으로 영화 속 대니와 포지션이 비슷하다. 대니의 남성 칭구는 노골적으로 이름이 크리스천이다. 칭거나 방문자도 마찬가지지만 이름이 마크(마가), 조쉬(여호수아), 사이먼(시먼) 등 이스라엘 지도자본인 예수의 제자 이름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아시다시피 개별적으로 불멸의 혼이 있다는 것이다. '하본인'은 따로, 인간은 각자 분리된 존재다. 그래서 천국에 가려면 개개인이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저런 영혼관은 서구 개인주의 문화의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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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크리스티안 1행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대니가 겪는 불행을 어떻게 무시한다고만 합니다. 크리스천은 대니에게 그다지 의지가 되지 않는 남성 칭구로 의식적인지 서툰지 자주 대니에게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호르가 공동체에서 온 펠레를 제외한 칭구는 우울증에 걸린 대니를 자꾸 떼어내라고 부추긴다. 그래서 미드소마는 어떻게 보면 단절된 개인주의 미화신들을 응징하는 스토리로 보이기도 한다.​


    미드소마가 모두 주의를 비판하는 영화일까. 그런 요소가 있긴 해. 그러나 그것은 마치[한 3일의 금요일]본인[양들의 침묵이 살인을 비판하는 영화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은 관객을 놀라게 하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지 어떤 윤리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은 아니잖아요. 홀거 마을의 인신공양은 경악하지만 교리에 설득력이 있다. 그 제안의 야만성일 뿐, 여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 문명이 사라진 어떤 태고적 신성함 같은 것이 담겨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지독한 모순 앞에 던져진 우리는 이거 현미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관객을 이렇게 경악시키는 것이 이 악취미를 가진 감독의 진짜 안일 겁니다.유전 때도 그랬지만 미드소마는 앨리 아이스터 감독의 변태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영화다. 데이비드 린치와 라스 폰 트리에의 변태성을 전승하는 걸출한 감독의 출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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